(아래 글은 보이차에 대한 정보보다는 보이차에 빠진 인간이 어떤 생활을 하는지를 묘사한 잡문입니다.)
보이차를 처음 접한 건 2015년입니다.
친구의 자취방에 놀러갔는데, 이 친구가 보이차가 급히 빠져 있었습니다. 급히 빠져 있었다고 쓴 이유는 이 친구는 급히 다시 보이차에서 빠져나갔기 때문입니다. 각설하고 당시 이 친구는 보이차에 빠져서 매일 리터 단위로 보이차를 마시곤 했습니다. 당시 친구가 마시던 차는 지유명차의 차들이었습니다. 이 친구가 다니던 곳이 인사동의 지유명차와 대익 다경향실 대리점이었습니다. 차를 많이 사지는 않으면서, 저에게 하루 5시간씩 앉아서 마시고 올 때도 있다고 자랑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당시 판매하시는 사장님들 입장에서는 돈도 안되는 손님에 꽤 고생이 심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
아무튼 이 친구가 저를 인사동 다경향실에 데려갔습니다. 거기서 김헌국 사장님을 처음 뵙고 주시는 차를 얻어마셨던 기억이 납니다. 친구는 저에게 2013년 7572를 한 편 선물했습니다. 그리고 함께 인사동의 한국문화정품관 이라는 곳에 들러서 개완과, 거름망과, 찻잔과 찻잔 받침 등 친구가 권하는 필수 물품을 몇 만원 주고 사서 돌아온 기억이 있습니다.
집에 돌아와 개완으로 차를 내려마시면서 저의 보이차에 대한 인생 소모(?)가 시작되었습니다. 소모라고 하면 맞을 것 같습니다. 네 보이차 취미는 상당히 소모적인 일입니다. 하루에 많은 부분을 인터넷에서 차를 구경하는 데 쓰고, 끊임없이 새로운 차를 사고 싶어 합니다. 이것은 보이차에 제대로 빠진 사람들의 거의 모두가 경험하는 일상사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겁니다.
개인적인 추측으로 보이차를 접하고 실제 보이차에 깊이 빠지는 사람은 채 10%가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깊이 빠진다는 것은 매일 보이차를 생각하며, 수시로 차 관련 커뮤니티를 드나들고 무슨 차를 살지 끊임없이 중독차처럼 헤메이는 취미가를 말합니다.
아래와 같이 빠지는(indulge) 사람과 스쳐 지나가는(passing by) 사람으로 나눌 수 있겠습니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
A : 보이차를 우연한 계기로 마셔봄 - 커피에 비해서 심심하고 나이든 사람들이 마시는 느낌이라 한 번의 경험으로 끝남. B : 보이차를 우연한 계기로 마셔봅 - '음 꽤 괜찮군. 마셔봐도 좋겠군.' 하면서 일단 1편 정도 구매 해봄. 이 부류는 막연한 차 문화에 대한 환상과 휴식, 여유라는 문맥의 연장선에서 차로 접근을 시도. |
B의 미래는 한 두달 안에 아래와 같이 결정되는 것 같습니다.
B-1 : 1편을 뜯어서 몇 번 먹어봄. 인스타에도 올리고 차 마시는 취미 생겼어요~ 하면서 몇 번 마셔보시만 깊이 빠지지 못하고 먹다만 채로 끝남.
B-2 : 1편을 뜯어먹기 시작하면서, 다른 보이차에 관심을 가지게 됨. A-2 부류는 보통 수집에 대한 욕심이 있는 편이며, 약간 사물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세심한 타입이 많음. 보이차가 주는 세부적인 차이점을 느끼면서 점점 보이차의 깊은 세계로 하염없이 빠져들어감.
<깊이 빠지는 사람>
제 경우가 B-2의 사례입니다. 이제 이 부류는 보이차를 본인 취미의 가장 큰 범위로 키우게 됩니다. 본인이 가용한 자산(보통 용돈이 되겠지요)의 대부분을 차를 사는데 쓰며, 그 일부는 차도구인 자사호를 사는데 쓰게 됩니다. 특징은 끊임없이 새로운 차를 사면서, 짧은 순간에 본인이 평생 마시지도 못할 차를 구매해서 보관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문제는 이 구매에 대한 방향성에 제동을 걸기가 상당히 힘들다는 점입니다. 편, 통단위를 거쳐 건단위로 구매를 하는 경우도 생겨나는데, 통단위만 해도 한 사람이 마셔서 소모하기는 상당히 힘든 단위입니다. 통 단위는 보관을 잘할 경우에 십년 이상 단위가 지나면, 소소하게 장터에 팔아서 짭잘한 용돈벌이 정도의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보이차가 다른차와 다른 가장 큰 점은 세월에 의해 변화(성숙)한다는 점입니다. 녹차, 홍차 등과 달리 보이차는 발효(자동산화)에 의해 월진월향(세월에 의해 맛이 점점 더 좋아짐)하는 보기 드문 차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이차에 깊이 빠져 허덕이는 데에는 그럴만한 깊은 매력이 숨어있습니다.
보이차라는 취미는 말 그대로 취미이기 때문에 과하면 상당히 소모적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매달 최소 10만원씩만 차를 산다고 해도, 취미로는 적은 돈이 아닙니다. 적금을 들어도 꾸준히 쌓아나갈 만큼의 돈인데, 보이차에 빠지면 월 10만원으로는 어느 순간 본인의 욕구를 채우기에 턱도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여기서 선택과 집중이라는 기로에 서게 됩니다. 제 경우는 최대한 다양한 차를 접해보고 구매하는 것으로 4년여를 보냈고 지금은 평생 먹을 만큼의 차가 이미 쌓여서 집중의 방향으로 길을 정했습니다. 2020년 부터는 양이 적더라고 맛이 좋은 고수차만을 소량으로 구해서 마시고 있습니다. 매달 사고, 매달 사는 양을 매달 완전히 소모하지 못하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소량의 고수차라도 제가 먹을 만큼 익어가면서 쌓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보이차를 마시는 취미는 재정적으로는 상당히 소모적인 편이지만, 정신적/문화적으로는 상당히 풍요로워질 수 있는 취미라는 점입니다.
한가한 일요일 오전 내려 마시는 차 한잔,
밤 늦은 시간 아내와 마주않아서 따뜻하게 내려 마시는 차 한잔,
눈이 내리는 날, 창밖의 눈을 보며 한 잔,
비가 내리는 날, 쏟아지는 비를 보며 한 잔,
삶을 따뜻하게 채워주는 보이차를 당신에게도 추천합니다. 당신이 B-1이 될지, B-2가 될지는 차를 직접 마셔보기 전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차와 함께 행복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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